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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산타클로스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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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외투에 흰 수염, 선물 가득한 자루를 멘 산타클로스는 오늘날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하지만 그의 기원은 고대 신화와 성인 전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명사에서 신성, 축제, 자연현상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산타 클로스는 서양의 신화적 인물들이 잇따라 변모하면서 등장한 인물로, 여전히 그들의 몇 가지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 북유럽 신화의 오딘에서 시작해, 4세기 소아시아의 성 니콜라스, 그리고 19세기 미국에서 상업적으로 변모한 모습에 이르기까지, 산타클로스는 시대와 문화를 넘어 변형되고 재해석되었다. 산타는 단순한 크리스마스 아이콘을 넘어, 선물, 희망, 나눔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담은 인물로 자리 잡았다.

 

 

상상의 시작

산타클로스의 기원은 예수 등장 이전까지 추정할 수 있다. 기독교 이전 시대, 북유럽 신화의 주신(主神) '오딘(Odin)'은 다리가 여덟 개인 말 '슬레이프니르(Sleipnir)'를 타고 하늘을 가르며 집집마다 선물을 나눠주었다. 그 후계자인 로마 신화의 아폴론(Apollon)은 태양 전차를 몰고 지구를 돌아다니며 빛을 퍼뜨린다.

 

오딘(Odin)과 다리가 여덟 개인 말 슬레이프니르(Sleipnir)

 

 

성 니콜라스에서 산타클로스로

기원후 270년경, 현재 터키의 파타라(Patara)에서 니콜라스(Nicolas)가 태어났다. 어릴 때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미라(Myre)의 주교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그를 아마도 개종 활동(포교) 때문에 350년경 12월 6일 처형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목에서 성유(聖油)가 솟구쳤다고 한다. 순교자로 사망한 그는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1087년경, 이탈리아 출신 십자군 병사들에게 한 무리가 성인의 무덤을 보여줬고, 병사들이 무덤을 열어 성유에 잠긴 유골을 훔쳐 바리(Bari)로 가져갔다. 이후 엉터리 치유 성유를 판매하며 이득을 취하는 사기꾼들이 등장했다.

파타라(Patara)의 니콜라스(Nicolas)



12세기,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로렌(Lorraine)의 기사 오베르 드 바랑제빌(Aubert de Varangéville)은 바리에서 '축복하는 손가락의 한 마디'를 가져와 로렌의 '생-니콜라-드-포르(Saint-Nicolas-de-Port)'라는 이름의 마을에 보관했다.

Saint-Nicolas-de-Port 대성당의 성 니콜라스((Saint-Nicolas)

 


성 니콜라스에 대한 신앙은 프랑스 동부와 북부,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에서 크게 퍼졌다. 그 가운데 유명한 전설 중 하나는 푸줏간 주인이 세 아이를 죽여 절여놓으려 했으나, 성 니콜라스가 이를 부활시킨 이야기다. 이 푸줏간 주인은 성 니콜라스의 동료이자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페르 푸에타르(Père Fouettard)'가 되었다. 이들은 12월 6일에 함께 행진하며, 12세기부터 프랑스에서는 나중에 '노엘(Noël)'이라 불린 노인을 동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 니콜라스와 페르 푸에타르

 


성 니콜라스는 학생들의 수호자로, 12월 5일 밤에서 6일 사이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다. 아이들은 벽난로나 문 앞에 신발을 놓아 성인이 선물을 두도록 했으며, 이에 보답으로 성인의 당나귀를 위해 설탕, 우유, 당근을 준비했다.

 

 

 

각 전통들의 융합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도들은 기독교의 주요 인물에 집중하기 위해 성인들을 배제했다. 독일에서는 '아기 예수(Christkindel)'가 성 니콜라스를 대체했지만, 네덜란드에서는 '신터클라스(Sinter Klaas)'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기 예수는 썰매를 끌기에는 너무 작고 선물을 나르기에도 약했다.

 

'아기 예수' 또는 '아기천사'라는 뜻의 '크리스트 킨트 (Christkind)' 묘사

 


18세기 독일에서는 요정, 엘프, 그리고 '바이나흐츠만(Weihnachtsmann, 크리스마스의 남자)'이라는 인물이 다시 등장했다. 그는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를 싣고 썰매를 타고 다니며 선물을 나눠줬다.

 

 


북유럽에서는 '니세(Nisse)' 또는 '톰테(Tomte)'라는 난장이들이 겨울 중간 축제인 '미드빈터블로(Midtvintersblo)'에서 인간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북유럽의 크리스마스 상징 동물 Julbocken



17세기에 성 니콜라스(Saint Nicolas)는 네덜란드 이민자들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으로 전파되었다. 그들은 그를 '신터클라스(Sinterclaes)'라고 불렀고, 이후 산타클로스(Santa Claus), 나아가 파더 크리스마스(Father Christmas)로 진화하게 된다. 당시 미국 이민자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 전통의 공존했는데,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가톨릭 이민자들은 크리스마스 축제에서 아기 예수에게 집중한 반면, 영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은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의 전통을 유지했다.

17세기의 파더 크리스마스(Father Christmas)

 

 

17세기 말, 영국의 삽화에서는 '파더 크리스마스(Father Christmas)' 또는 '로드 크리스마스(Lord Christmas)'라는 인물을 묘사했다. 오딘처럼 초록색 후드 망토를 두르고 꽃, 아이비, 겨우살이로 만든 관을 쓴 모습이었다. 그는 집집마다 다니며 식탁에 앉았는데, 그를 잘 대접하면 겨울이 온화하다고 믿었다.

 

19세기 초 산타클로스의 묘사

 

 

1809년, 작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은 산타클로스를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르며 나무 위를 날아다니는 마차를 탄 늙은 요정"으로 묘사했다.

 

 

 

1822년, 미국 목사 클레먼트 클라크 무어(Clement Clarke Moore)가 썼다고 알려진 익명의 또 다른 시 '생니콜라 방문기(A Visit from St. Nicholas)'에서는 '작고 통통한 늙은 생닉(St. Nick)'이 여덟 마리의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집 지붕 위를 종소리와 함께 이동하며 굴뚝을 통해 선물을 나눠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시점부터 산타는 털로 된 코트를 입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1870~1890년 프랑스에서는 산타클로스가 흰 수염의 노인으로 등장했으며, 그가 입는 외투는 초록, 파랑, 노랑, 보라, 주황, 갈색 등 다양했다. 붉은 외투는 1914년 직전에 등장한다.

 

 

 

산타의 순록

앞서 소개한 클레먼트 클라크 무어(Clement Clarke Moore)의 '생니콜라 방문기(A Visit from St. Nicholas)' 를 통해서 우리는 산타클로스의 여덟 마리 순록들의 이름을 처음 알게되었다. Dasher, Dancer, Prancer, Vixen, Comet, Cupid, Donder, Blitzen가 그들이다. 이 순록들은 이후 많은 책과, 훨씬 나중에는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다가 1939년, 시인 로버트 L. 메이(Robert L. May)는 붉은 코를 가진 순록 '루돌프(Rudolphe)'의 이야기를 창작했다.

 

 

 

신화적 인물에서 상업적 아이콘으로

1838년, 로버트 월터 웨어(Robert Walter Weir)는 산타클로스를 빨간색과 흰색 의상을 입고 작은 체구를 가진 심술궂은 요정으로 묘사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은 체구는 굴뚝을 쉽게 통과할 수 있는 특징으로 표현되었다.

 

로버트 월터 웨어(Robert Walter Weir)가 묘사한 산타클로스

 

 

1863년, 독일 태생의 미국인 토머스 나스트(Thomas Nast)는 뉴욕의 잡지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에 털옷을 입고, 검은 허리띠와 모자를 착용한 배불뚝이 캐릭터의 흑백 그림을 게재했다. 그는 북극, 즉 추운 지역이며 당시에는 신비롭고 미지의 장소로 여겨졌던 곳에서 온 것으로 그려졌다. 나중에 그의 그림은 시대의 유행에 따라 색이 추가되었다.

 

토머스 나스트(Thomas Nast)의 산타클로스

 

 

1921년, 노먼 록웰(Norman Rockwell)은 '더 컨트리 젠틀맨(The Country Gentleman)'의 표지를 위해 빨간색으로 채색된 '생닉(Saint Nick)'을 그렸다.

 

노먼 록웰(Norman Rockwell)의 생닉(Saint Nick)

 

 

1931년, 스웨덴계 미국인 하던 선드블롬(Haddon Sundblom)은 코카콜라(Coca-Cola)사를 위해 인간 크기의 산타클로스를 그렸다. 그는 산타클로스의 따뜻하고 친근한 분위기, 둥글둥글한 몸매와 유쾌한 표정을 유지하며 이 캐릭터를 완성했다. 코카콜라는 미국 겨울철 동안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음료를 여름이 한창인 더운 나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코카콜라와 함께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하던 선드블롬(Haddon Sundblom)의 산타클로스

 

 

산타클로스와 아기 예수, 선택의 문제인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상업화된 산타클로스가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산타클로스의 상업적 이미지는 예수 탄생의 의미를 흐리게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1951년, 프랑스에서는 이 문제가 정치적 논쟁으로까지 번졌다. '라 크루아(La Croix)' 신문은 "가톨릭 운동 단체들이 산타클로스를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같은 해, 한 신부는 디종(Dijon) 대성당 철창에 걸린 산타클로스 인형을 아이들 앞에서 불태우는 사건을 벌였고, 이는 언론을 통해 크게 화제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크리스마스의 과도한 상업화는 종교적 축제의 본래 의미를 잃게 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다. 하지만 유명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는 산타클로스를 방어하며 그를 "특정 연령대를 위한 신적인 존재"로 보았다.

또한, 정신분석학자 '프랑수아즈 돌토(Françoise Dolto)'는 산타클로스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그녀는 산타클로스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 아이들이 한 단계 성장하는 통과의례라고 설명했다. 그녀의 이러한 신념은 당시 우체국 장관이었던 그녀의 오빠의 지원을 받았다. 1962년, 돌토는 아이들이 산타클로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답장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시스템은 오늘날에도 현대화된 형태로 유지되고 있으며,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

 

 

오늘날의 산타

오늘날 핀란드 라플란드(Lapland)에는 산타클로스 마을이 있다. 이곳은 극지방의 추운 기후 속에서 아이들의 꿈을 실현하며 동심을 자극하는 여행지로 알려져 있다. 방문객들은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극한 환경에서 동화 같은 경험을 하며, 어릴 적 꿈꾸던 상상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

 

핀란드의 산타클로스 마을

 

 

의미를 찾으려는 현대 사회에서 산타클로스는 여전히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친근하고 공감 가는 캐릭터에 끌리고, 상업적 재미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을 매료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산타클로스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랑받는 인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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